4장 현지: “먼저 와 있었네요, 선배. 아, 혹시 오래 기다리셨어요?” 나: “아니, 방금 도착했어.” 덜컹, 하고는 옥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품에 무언가를 안은 채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현지. ‘오랜만이에요~’라고 내게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특히나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교복 차림인 현지를 보며, 마치 지금이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인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으니 말이다. 복장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꺼내지 않았다. 물어봤자 ‘편하니까요’ 같은 지극히 현지다운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나: “그나저나, 왜 굳이 학교 옥상에서 보자고 한 거야?” 현지: “그거야, 여기가 아니면 안 되니까 그렇죠.” 현지는 품에 안고 있던 가정용 전자레인지 정도 되는 크기의 물건을 내게 건넸다. 오컬트부실 구석에 놓여있던, 소녀가 내게 물어본 적 있는 바로 그 ‘텔레이도스코프’라 이름 붙여진 기계였다. 나: “우왓, 제법 무겁네. 혹시 이거 때문에 여기로 부른 거였어?” 현지: “맞아요. 저기, 위에 있는 안테나랑 이걸 연결시켜야 하거든요.” 현지의 손가락이 반대편 난간 쪽의 대형 안테나를 가리켰다. 현지는 주머니에서 길다란 케이블을 꺼내더니, 이를 텔레이도스코프에 꽂으며 말했다. 현지: “연결하는 거, 도와줄 수 있죠?” 나는 안테나의 기판이 위치한 옥상 난간 쪽으로 현지가 건넨 텔레이도스코프를 들고선 걸어갔다. 현지: “거기서 파란색 케이블을 빼고 텔레이도스코프에 연결된 케이블을 꽂기만 하면 돼요.” 몇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현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간대 끝자락의 기판을 향해 손을 뻗자 희미하게 불어오던 바람의 감촉이 더욱 선명해졌다. 파란색 케이블을 뽑으려다 말고, 나는 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이 케이블, 빼도 괜찮으려나?” 현지: “방학 땐 학교에 따로 사람도 없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나쁜 짓 하는 건 아니잖아요.” 누구랑 참 비슷한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블을 연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현지가 직접 하는 편이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 “연결했어. 이제 다 됐어?” 현지: “잠시만요. 확인해 볼게요.” 멀리서 스위치를 돌리는 듯한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난간대에서 몸을 떼어낸 나는 텔레이도스코프를 조종하고 있는 현지에게 다가가 보았다. 나: “뭐 하는 거야?” 현지: “디지털 신호를 최대한 아날로그 신호와 가깝게 변환하고 있어요. 시간은 아날로그 형태의 정보니까요.” 텔레이도스코프가 빛을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물론 아날로그 신호니, 디지털 신호니 하는 현지의 이야기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저 현지가 텔레이도스코프를 조정하는 것을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을 수밖엔. 텔레이도스코프를 조정하던 현지는 내게 케이블 하나를 더 건네더니, 이번엔 그 케이블을 기판의 다른 곳에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로 케이블을 세 개 정도 더 연결하고 나서야 텔레이도스코프의 조정이 끝났다. 현지: “아, 됐다. 자요, 이거 한 번 써 봐요.” 나: “잠깐만. 그래도 이게 뭔지는 설명해 줘야지.” 현지는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내게 헤드셋을 내밀었다. VR 헤드셋을 개조한 듯 보이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헤드셋이었다. 헤드셋을 착용하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고,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전자음이 청각을 교란시켰다. 현지: “그럼 시작할게요.” 전자음이 들려오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텔레이도스코프가 작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짧아져 가는 전자음의 주기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점처럼 떨어져 있던 전자음이 이루는 간격이 점점 좁아져, 소리가 선을 이루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만화경 같은 빛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텔레이도스코프. 명멸하는 빛의 형태가 왜 이 기계의 이름이 텔레이도스코프인지 알려 주고 있었다. 빛이 사그라들고, 언젠가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 듯한 감각이 나를 휘감는다. 내 몸에서 나 자신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착각인 걸까? 글쎄, 착각 같지는 않았다. 익명: “저…… 오컬트부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흔히들 주마등이나 파노라마 같다고 하는 기억의 재생. 나는 지금 그런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일까. 익명: “헤헤…… 제가 오컬트 쪽에 관심이 좀 많아서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과 함께, 입부 신청서를 들고 나의 앞에 나타났던 한 안경 여학생. 2학년이 된 직후, 나는 얼떨결에 오컬트부 부장을 맡게 되어 부원을 모집하던 중이었다. 익명: “선배가 오컬트부 부장인가요?” 나: “아, 으응.” 익명: “자, 잘 부탁드려요……!” 어색한 구석이 잔뜩 느껴지는 인사와 함께, 그 여학생은 급히 사라졌다. 나: ‘현지…… 라고 하구나.’ 입부 신청서에는 ‘현지’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것이 현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오컬트부의 단둘뿐인 부원이자, 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이렇게 될 줄은, 그때는 당연히 짐작조차 못 했었다. 현지: “부실 분위기가 되게 좋네요. 인테리어는 직접 꾸민 거죠?” 나: “어, 맞아.” 현지: “왠지 어울리네요.”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은 다 내가 짊어지게 되어버린 건지. 부실을 둘러보며 가벼운 이야기로 떠들썩한 현지와는 달리, 나는 그녀의 말에 어색한 맞장구만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현지: “그런데 다른 부원들은 언제 오나요?” 나: “아, 그게…….” 언제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타이밍만 살피고 있었는데. 먼저 말을 꺼낸 건 현지 쪽이었다. 나: “부원은 이게 다야.” 깜빡깜빡. 현지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술 근처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저 때도 그랬었구나. 고민에 잠길 때면,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현지: “인원이 다섯 명도 안 되는 동아리는 폐부되는 거잖아요…….” 실망감 섞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나: “아, 그건 아냐. 명목상의 유령 부원이 있거든. 폐부될 일은 없겠지만, 별로라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다른 부로 옮겨도 돼.” 머쓱함만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을 줬어야 했는데, 라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현지: “정말이죠……?” 나: “으응. 괜찮아.” 현지: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폐부 안 되는 거 맞죠?” 깜빡깜빡깜빡. 미묘한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현지: “유령 부원뿐인 오컬트부라니, 마음에 드는걸요.” 나: “…….” 현지: “그럼 이제 여기서 뭘 하면 되나요? 초능력? 최면술? 강령술? 아니면…… 부두 인형 만들기라도? 혹시 재미있는 도시전설이라도 조사하러 다니는 건가요?” 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작년부터 OBE를 연구하고 있었어.” 현지: “아, 그거 유체이탈 말하는 거죠?” 나: “어라, 알고 있었네.” 현지: “오컬트에 관심 많다고 했잖아요?” 미묘하다 생각했던 현지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현지: “그래서, 이런 걸로 학년 말에 논문이라도 내려는 거예요?” 선반에 꽂혀있던 자료들을 신기한 듯 살피는 현지. 나: “아니.” 선반을 훑던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 “직접 해보고 싶어서. 유체이탈이라는 거.” 그 말을 듣자, 선반을 향해 있던 현지의 시선이 홱 돌아 나를 향했다. 그 장면을 끝으로 기억이 끊겼다. 기워 붙여 놓은 필름 조각처럼, 기억 속의 장면들이 도약하듯 움직였다. 현지: “아얏, 아야야야…….” 나: “넌 어떻게 여자애가 나보다 바느질을 못하냐…….” 현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저도 선배한테 말할 거 산더미거든요.” 나: “아, 그렇네. 미안.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줘.” 이건 방학식이 있기 일주일 전쯤의 기억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열릴 학예제를 준비하기 위해 부실에 모인 나와 현지는, 어째서인지 둘 사이에선 아무런 접점도 보이지 않는 인형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나: “그나저나 학예제에 인형 판매 부스를 연다니,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한 거야?” 현지: “어차피 다른 생산적인 활동을 할 것도 아닌데, 돈이라도 벌면 좋죠.” 나: “보통 다른 동아리에서 판매 부스를 열면 수익금은 어디 기부하거나 그러던데.” 현지: “안 돼요. 정확하게 반반 나눠 갖기…… 아얏!” 벌써 세 번이나 바늘에 찔린 손을 매만지고 있던 현지였다. 현지의 손에서 불그스름한 색이 묻어났다. 나: “…… 이리 줘봐.” 나는 현지의 손을 잡아당겨선, 상처를 매만지며 우스운 주문 하나를 외웠다. ‘엄마 손은 약손’ 이었던가. 대충 ‘선배 손은 약손’ 같은 멋대로 고친 주문을 읊조리자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현지: “뭔가요, 그 낯간지러운 말은.” 나: “엄마한테 들었는데, 이런 주문과 함께 손을 쓰다듬으면 아픈 게 날아간대.” 현지: “뭐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 “여긴 오컬트부니까.” 현지: “…… 뭐예요, 그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불만 어린 항변을 중얼댄 현지는, 스르륵 손을 빼고선 인형 만들기를 계속했다. 나는 완성된 테루테루인형을 탁자 위에 올려두어 보았다. 현지도 막 완성한 부두인형을 테루테루인형 곁에 놓아 두었다. 나: “생각보다 그럴싸하게 생겼네.” 그 말을 끝으로, 기억이 다시 요동쳤다. 현지: “선배, 이 사이트 좀 확인해 주세요.” 나: “알겠어.” 나의 기억은 여전히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었다. 이번엔 조금 더 오래된 기억이었다. 3개월 전쯤의 일이려나. 내가 현지에게 비밀을 털어 놓고 난 바로 다음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 “그나저나, 그 전자레인지같이 생긴 기계는 뭐야.” 현지: “이거, 텔레이도스코프라는 거예요.” 나: “텔레이도스코프? 처음 들어 보는데.” 현지: “그야 당연하죠. 제가 이름 붙인 거니까요.” 현지는 자신이 붙인 이름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학교 옥상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현지는 텔레이도스코프라는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용도도 알지 못한 채 현지의 말을 따라 텔레이도스코프의 제작을 도와왔던 것이다. 회상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간 개념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현지: ――― 현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현지: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현지의 목소리에서는 다급함이 잔뜩 묻어나 보였다. 현지: 선배―――――― 뭔가를 떠올릴 새도 없이 공간이 일그러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헤드셋 너머에서, 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지: “어때요?” 나: “…… 뭐야, 이거?”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헤드셋을 벗으며 현지에게 물었다. 현지: “뭐긴요. 유체이탈, 그리고 시간 여행이죠. 선배는 방금 텔레이도스코프를 작동시킨 50초 뒤의 미래로 유체이탈 한 거예요.” 나: “…… 50초?” 50초 치고는 너무 긴 회상이었던 것 같은데. 1분 남짓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잠시 시간 개념을 잃었던 거라고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현지: “50초 뒤의 미래로 오는 길에, 선배는 무엇을 봤나요?” 나: “그게 무슨 소리야?” 현지: “어라, 눈앞에 뭔가 보인 거 없었어요?” 나: “글쎄, 뭔가 주마등처럼 휙휙 지나가긴 했는데…….” 생생한 기억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현지의 말대로, 정말 눈 앞에 펼쳐진 듯한 생생한 기억. 현지: “선배는 회상을 한 게 아니라, 정말 그곳에 있었던 거예요. 방금은 너무 짧은 시간 간격을 이동한 거라 진동이 순식간에 끝났겠지만요.” 현지: “아직 수식 완성이 덜 돼서, 이렇게 짧은 시간밖에는 못 움직여요.” 나: “내가 정말 그곳에 있었다고?” 현지: “네.” 나: “으음…….”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이 진지한 색을 띤 현지의 눈동자는, 거짓이나 장난과는 거리가 한참 있어 보였다. 현지: “기억나는 거 있어요? 뭘 봤는지 말이에요.” 나는 주마등처럼 지나갔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나: “네가 나랑 처음 만났던 날. 그리고 같이 저 텔레이도스코프 만들었던 거. 그리고 학예회 준비 한답시고 인형 잔뜩 만들었던 거.” 현지는 태블릿을 꺼내 내가 이야기한 것들을 기록해두었다. 나: “그리고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기억이 잘 안 나네.” 현지는 펜을 한 번 돌리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현지: “지금으로선 50초로 5개월 정도를 진동할 수 있는 것 같네요. 음, 이 정도면 첫 구동으로는 대만족인데요?” 나: “정말 만화경 같네.” 뭐라 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오컬트부에서 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말했던 ‘유체 이탈을 하고 싶어’라는 소원은 이렇게 이뤄지게 된 걸까. 유체 이탈도 있고, 유령도 있고, 시간 여행도 있다. 그리고 내 앞의 이 여학생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 있다……. 다시 한번 내가 서 있는 공간이 꿈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 “…… 어떻게 만든 거야?” 물론 이런 질문을 한다 해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딱히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현지: “여태껏 같이 열심히 만들고 있었잖아요.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거죠.” 나: “난 저 기계가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현지: “에헤헤…….” 나: “…… 대단하네.” 현지: “뭘요.” 텔레스코프에서 손을 떼며, 현지는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지: “그때 로봇 이야기했었잖아요. 그 뒤로 유령의 주변에서 전기 신호가 미묘한 간섭을 받는 건 아닐까 했는데, 아마 그런 것 같더라고요.” 나: “그거랑 방금 내가 경험한 유체이탈이랑, 어떤 상관이 있어?” 현지: “일단, 유령이라는 존재는 3차원 이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고요.” 현지는 눈을 깜빡였다. 현지: “선배, 혹시 지금 그 유령이랑 같이 있어요?” 나: “아니, 나 혼자뿐이야.” 현지: “헤헤, 여기엔 저희 둘뿐인가요.” 아마 그렇겠지. 미래의 내가 또 다시 텔레이도스코프를 통해 지금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현지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브리핑을 하듯 설명을 이어갔다. 현지: “전자기파는 전기장, 자기장이 3차원 공간에서 서로 수직하게 진동하며 나아가는 파동이잖아요.” 나: “그렇지.” 현지: “그런데 유령 주변에서는 3차원 좌표로 나타내지 못하는 제3의 파동이 전기장, 자기장에 동시에 수직하게 진동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 파동이 로봇의 전자기장에 간섭을 한 것 같아요.” 현지: “거꾸로 말하면, 전자기장이 그 미지의 파동에 간섭할 수도 있다는 거죠.” 현지: “선배의 영혼은 그 간섭된 파동을 타고 50초 뒤의 미래로 날아온 거예요.” 나: “…… 조금만 더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 현지: “쉽게 이야기하자면, 시간과 같은 좌표 개념이 더해진 새로운 좌표계가 유령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거예요.” 현지: “그리고 그 좌표계에서 일어나는 파동의 진동은 음의 값을 가질 수도 있고요.” 현지: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에요.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도 시간을 나타내는 변수에 음의 벡터값을 넣더라도 식이 성립하거든요.” 나: “으음…….” 여기가 오컬트부인지 양자역학 연구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음 소리인지 알겠다는 신호인지 모를 음성을 내고는, 나는 옆을 힐긋 돌아보았다. 당연히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부족한 나의 뇌로도 결론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런 거 아닐까? 나: “그럼 지금 내가 50초 전의 과거로 유체이탈을 할 수도 있어?” 현지: “아뇨. 아직은요. 아직 생각해 봐야 할 게 많아서요.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는 거죠.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나: “그렇구나.” 현지: “다른 변인도 찾아야 하고, 수식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나: “얼마 정도?” 현지: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지개를 켜고는, 현지는 그대로 옥상에 몸을 털썩 누였다. 떨어지는 햇살과 정면으로 마주하던 현지는 고개를 슬쩍 돌려선 나를 바라보더니, 이번엔 자신이 질문을 건넸다. 현지: “그 유령이랑은 좀 진전이 있어요?” 나: “어느 정도는?” 현지: “흐음, 그것도 여태껏 저한테는 비밀로 해뒀던 거네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현지는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을 내게 지어 보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현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현지: “선배, 저 배고파요.” 나: “이 시간에 갑자기……?” 혹시 시각을 착각했었나 하는 생각에 태블릿을 열어 시계를 확인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1시 40분. 근처 식당에라도 도착한다면 두 시 정도가 될 것 같았다. 확실히 점심때라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는 시각이었다. 나: “점심 먹고 난 뒤에 만나려고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한 거 아니었어?” 현지: “전 막 일어나서 씻고 온 건데요. 방학이잖아요.”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째 내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타이머가 나와 다른 걸까. 뭐, 주변인이라 해봤자 두 명밖에 없긴 하지만. 옆을 슬쩍 바라보자 노골적인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나: “…… 알겠어.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 현지: “예에~” 나: “그전에, 이 텔레이도스코프는 두고 갈 거야?” 현지: “음…… 역시 부실에 놔두는 편이 안전하겠네요. 선배가 케이블 좀 뽑아올 수 있나요?” 텔레이도스코프를 챙겨 오컬트부 부실에 놓아두고는,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현지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무인 발권기에서 식권을 뽑고는 자리에 앉았다. 점심때가 지난 식당은 한산하다 못해 조용하기까지 했다. 나: “평소에도 이때쯤 점심 먹는 거야?” 현지: “네. 사람도 없고 좋잖아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주문한 음식은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식탁에 놓였다. 튀김 우동 한 그릇. 현지는 젓가락을 들며 입맛을 다셨다. 현지: “잘 먹겠습니다~” 나: “좀 더 비싼 거 골라도 되는데.” 현지: “음…… 그 말 킵해놨다 다음에 써도 돼요?” 나: “내 말이 무슨 쿠폰이냐, 킵해놓게.” 현지: “에헤헤…….” 후루룩 소리를 내며 우동을 먹기 시작하는 현지.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선, 늦은 점심을 먹는 현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그나저나, 혼자서 잘도 그런 걸 만들었네.” 현지: “텔레이도스코프요? 에이, 선배도 같이 만든 거잖아요. 조사해 둔 게 아니었더라면 못 만들었을 거예요.” 나: “그런가.” 영혼 없는 대답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분명 빈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나: “너는 별 감흥 없는 거야? 유체이탈을 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는데?” 현지: “아직 시험 단계잖아요. 해결해야 할 것도 많고…… 그리고 전 선배가 조사해둔 것들을 토대로 만든 것뿐이라고요.” 나: “겸손하네.” 겸손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라 사전이라도 뒤져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 “그럼, 텔레이도스코프가 완성이 되면 나는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거겠네.” 현지: “그렇긴 한데, 생각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어요. 아직은 가설일 뿐이지만…….” 현지는 국물 한 모금을 후루룩 마시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지: “유령인 상태로 유체이탈을 해서 시공간을 이동하다 보면, 불가피한 기억 상실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나: “기억 상실?” 현지: “네. 선배가 지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현지: “물론 선배가 유체이탈을 하는 도중에 주마등처럼 마주치는 장면들이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줄 수도 있겠지만, 그 대신 여기서의 기억을 잃을지도 몰라요.” 나: “어느 정도?” 현지: “…… 아마도 거의 다요.” 나의 의견을 확인하려는 듯 현지는 내 눈치를 살폈다. 현지: “유체이탈이 끝났을 땐 선배가 미래 세계에 존재했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나겠죠.” 나: “해결 방법은 없어?” 현지: “지금으로선요.” 가설일 뿐이라고는 했지만,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기억을 잃는다……. 정확하게는 잃어버린 기억을, 잃어버렸던 기억으로 메우게 된다는 거겠지. 막연했다. 지금의 나는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채일 텐데, 어째서인지 지금의 기억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또 다른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현지: “그리고 두 번째로, 선배의 영혼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다 해도, 영혼이 들어갈 몸을 찾는 게 문제예요.” 나: “원래 있던 내 몸으로 들어가면 되잖아.” 현지: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야 해요. 만약 선배가 원래 자기의 몸을 되찾지 못했을 경우도요.” 나: “골치 아프네.” 현지: “일단 제일 큰 문제는 이 두 가지예요. 생각하다 보면 더 나올 수도 있겠지만요.” 허리를 펴고는, 생각에 빠졌다. 테이블에 붙어있던 몸을 떼어내자, 내 몸이 시선에 들어왔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식사에 열중하던 현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 “내가 정말 유체이탈을 해서 과거로 가게 되면, 여기 남겨진 몸은 어떻게 돼?” 현지: “아, 그것도 있네요.”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반응이었다. 나: “시체 치우는 건 확실히 좀 그렇겠다.” 현지: “으엑, 점심 먹는데 시체가 뭐예요, 시체가.” 젓가락으로 면을 뜨려다 말고, 현지는 내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나: “그런가. 밥맛 떨어졌다면 미안.” 하긴, 식사 중이기도 하니까 주제를 조금 가벼운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다른 화젯거리가 없을까 생각을 해보려는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나와 현지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릇을 비워가는 현지를 슬쩍 바라보았다. 일방적인 시선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나와 현지의 눈동자가 그대로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현지의 시선에서는 뭔가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하는 듯한 눈치가 느껴졌다. 현지: “아, 선배. 그럼 제가 재미있는 문제 하나 낼 테니까 맞혀 볼래요? 텔레이도스코프랑 관계있는 거예요.” 나: “재미있는 문제……?” 현지: “네, 재미있는 문제요.” 현지의 웃음 포인트가 남들과 다르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평범한 청소년의 감성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현지는 난해함이나 괴팍한 천재 과학자의 감성에서 재미를 느끼는 쪽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문제를 내고 싶다는 티를 내면서까지 말을 꺼냈는데, 거기다가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 “…… 알겠어. 뭔데.” 나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지가 문제를 냈다. 현지: “저희는 지금 몇 차원에 있는 거게요?” 나: “3차원 아냐?” 현지: “땡~” 나: “이거, 혹시 장르가 수수께끼나 넌센스 같은 건가?” 현지: “아뇨. 굳이 따지자면 상식 아닐까요?” 나: “어…… 그렇다면 더더욱 모르겠는데.” 현지: “정말, 포기가 너무 빠르잖아요.” 나: “4차원…… 인가?” 현지: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의외라고 말하는 듯한 현지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나저나, 객관식인 줄 알았는데, 서술형이었다니. 솔직하게 찍었다고 하면 화내려나. 나: “아, 그게……. 오컬트적인 감이라고나 할까…….” 현지: “정말, 조금만 생각해보면 되는 거라고요.” 나: “정답, 5차원.” 현지: “선배 지금 생각 없이 내뱉은 거죠?!” 아무래도 너무 빨리 답을 한 모양이었다. 나의 심드렁한 목소리를 곧바로 간파한 현지가 나를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 “어라, 티 났어?” 현지: “정말, 조금은 성의 있게 생각해보라고요.” 나: “하지만 3차원 너머의 차원이라니, 너무 모호한 개념인걸.” 현지는 나의 근성 부족을 지적하듯 말했지만, 이건 엄연히 근성 부족이 아닌 능력 부족의 문제다. 물론 능력 부족이라는 해명이 자기 자신의 변호로 쓰인다는 점이 조금 쓰라리긴 했지만 말이다. 현지: “전혀 모호하지 않은걸요?” 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딱히 할 말이 없는데.” 현지: “정말이라니까요?” ‘지금 당장이라도 설명해주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현지의 얼굴에 드리운다. 아까의 퀴즈와 달리, 이번엔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달리 보이지 않았다. 나: “그럼 설명 좀 해줘.” 현지: “그럴까요?”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그럼 어쩔 수 없이 설명을 해야겠네요’라는 분위기로 이야기를 꺼내려는 현지였지만, 얼굴에 쓰여있는 표정은 이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현지: “먼저 1차원부터 보면, 1차원은 선배도 알다시피 직선이잖아요. 그래서 ‘같은 직선 위에 존재한다’라는 말이 쓸모가 없어요. 모든 점들이 같은 직선 위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 “그렇지.” 현지: “하지만 2차원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요. 평면에서 점은 서로 다른 직선 위에 위치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2차원에서는 같은 평면 위에 존재한다는 말이 무의미하겠죠?” 현지: “마찬가지로 3차원에서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말은 무의미해요. 항상 같은 공간에 존재할 테니까요.” 나: “우리는 항상 같은 공간에 있잖아? 공간 좌표계가 우주라고 한다면, 우리는 항상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거 아냐?” 현지: “글쎄요~” 현지는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우동 한 가락을 천천히 오물거렸다.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나를 현지는 빤히 바라보았다. 현지: “선배, 4차원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죠?” 4차원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지금 내 눈앞에 4차원 여학생이 존재하긴 한다. 나: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 좌표계에 시간축을 더한 거잖아.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현지: “맞아요. 그리고 그걸 시공간이라고 부르잖아요? 4차원에서는 같은 공간에 있다는 말이 유의미해요. 그 대신,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말은 무의미하고요.” 현지: “다시 3차원으로 돌아와서, 선배는 30분 전의 선배가 있던 곳으로 갈 수 있나요?” 나: “아니.” 현지: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면 갈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제야 현지가 하고 싶었던 말의 윤곽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나: “1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는 거네.” 현지: “맞아요. 그치만 1분 전의 선배가 지금의 저와 마주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1분 전의 선배는 1분 전의 저랑, 그리고 지금의 선배는 지금의 저랑 마주할 수밖에 없어요.” 현지: “즉,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말은 무의미하다는 거죠.” 나: “그러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요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4차원 세계라는 거지?” 현지: “맞아요. 그런 거죠.” 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상적인 개념이긴 했지만, 현지의 말대로 확실히 이해 못 할 것까진 아니었다. 현지: “하지만 5차원이 되면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말이 유의미해져요. 그곳에서는 지금의 선배가 몇 개월 전의 학교에 위치할 수도 있겠죠.” 나: “아까 텔레이도스코프에서 봤던 것처럼 말이지?” 현지: “맞아요.” 현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건 언제나 의미 있는 일이에요. 이 세계가 3차원이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선배와 제가 같이 식당에 있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거라고요.” 나: “뭐야, 그게.” 현지가 내린 결론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지만, 괜찮은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4차원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현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내게 퀴즈를 냈던 걸까. 현지: “아, 아무튼 그렇다구요.” 옆에 놓여있던 컵을 집어 들고선 물을 꼴깍꼴깍 마시는 현지. 현지는 빈 그릇을 챙겨 들고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지: “이제 슬슬 돌아가요.” 나: “그럴까.” 나도 현지를 따라 식당 밖으로 나섰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다시금 현지가 했던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고 있었다. 현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건 언제나 의미 있는 일이에요. 어째서인지 좋은 울림으로 남은 그 한 마디가, 머릿속을 자꾸만 맴돌았다. 같은 방향으로 20분 정도를 걸어, 현지는 “알아낸 게 생기면 다음번엔 꼭 연락해줘야 돼요?”라는 당부를 건네고선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 며칠간, 나는 소녀와 함께 리스트에 적혀 있던 장소를 돌아다녔다. 죽음을 마주한다는 지극히 비일상적인 일은 어느덧 일상처럼 변해있었고, 확인해야 할 장소 리스트에는 취소선이 하나둘씩 그여갔다. 늘어만 가는 취소선과는 달리, 상황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알아낸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첫 번째로는 소녀가 이야기했던 그 ‘따뜻한 사람’이란, 그녀 또래 정도 나이의 학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젠 소녀가 내 손을 잡는 데에 완전히 익숙해진 듯하다는 것. 문제라면 그 두 가지가 며칠간 알아낸 것의 전부라는 거지만. 그날은 D구역 외곽 지역에 있는 소각장을 둘러보기로 한 날이었다. 길을 찾는 데 조금 헤매는 바람에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한 소각장에서, 소녀는 익숙한 듯 죽음의 자취를 좇아 소각장을 거닐었다. 나는 그런 소녀의 뒤를 따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각장의 풍경을 관망했다. 얼마 정도 걸었을까, 소녀의 걸음이 멈췄다. 소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어느 한 소각로 앞에서였다. 소녀는 갑자기 소각로 위로 올라서더니, 그곳에서 허공을 빤히 응시했다. 분명 죽음의 색을 바라보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이곳은 사고가 일어났던 소각로였던 것이고 말이다. 소녀: “돌아가요.” 소각로 위에 서서 몇 분 정도 생각에 잠겨있던 소녀가 나를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이번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 함축적인 표현이었다. 나: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가 보네.” 소녀: “…… 네.” 이번에도 알아낸 건 헛걸음을 했다는 사실뿐인 걸까. 이걸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다닌 장소만 해도 벌써 연달아 다섯 곳이었다.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고, 나는 이쪽을 향하는 소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답답하다는 표정이라도 짓고 있었던 걸까. 소각로 위에 서서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녀가 나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사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아니면 정점을 찍은 여름날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을 하고 보니 무의식중에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 “소각장에서 보는 석양은 또 색다르네.” 허리 높이의 소각로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려던 소녀는 난데없는 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석양이라니, 아무래도 개연성 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왜 하필 석양이었는지는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상황에서 갑자기 석양을 바라보며 그런 말을 한 건, 어색한 침묵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소녀는 그 침묵 속에서 낙담한 얼굴을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였다. 침묵과 마주하는 대신,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등지고 있던 붉은 햇살을 바라보았다. 나: “늘 보는 석양인데 말이야.” 소녀: “…… 그렇네요.” 소녀가 석양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더위에 지쳐 갈라지기 시작한 목덜미에서 마른 숨결이 새어 나왔다. 나: “그나저나, 해가 거의 다 넘어갔는데도 덥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한참을 걸어서 그런지, 나의 등은 이미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곧장 샤워부터 해야겠지. 석양을 받은 소녀의 머리카락이 붉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석양을 바라보던 소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붉은색과 대비되는 창백한 소녀의 피부가 한층 차갑게 느껴졌다. 나: “유령은 땀 같은 거 안 흘리는 거야?” 소녀: “네. 덥다는 건 느끼지만요.” 나: “아, 그러고 보니 씻을 때 빼곤 화장실도 안 가는 것 같더라.” 분위기를 환기시킨답시고 너무 무리수를 뒀던 걸까. 소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 “…… 농담이야. 그럼, 유령이 되면 생리활동도 멈추는 거네.” 소녀: “그런 셈이죠.” 나: “으음, 그렇구나…….” 소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 건가요.” 나: “아, 아냐. 아무것도.” 소녀: “…….”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잠시, 소각로에서 폴짝 뛰어내린 소녀가 나의 손을 잡았다. 서늘한 소녀의 손길에서는 땀 같은 건 전혀 만져지지 않았다. 나: “어라……?” 터미널에 도착해 배차 시간표를 확인하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배차 시간표나 시계, 둘 중 하나를 잘못 본 거라 생각해 다시 한번 둘을 번갈아가며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대략 난감하다는 티를 잔뜩 내며 배차 시간표를 훑어본다 해도 뾰족한 수가 생길 리가 없었다. 한 걸음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소녀도 지금의 상황을 대충 알아챈 것처럼 보였다. 나: “…… 미안. 막차 시간을 착각했나 봐.” 뒤를 돌아보며, 나는 소녀에게 머쓱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A구역으로 향하는 막차가 떠나간 지는 15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설명을 듣고 난 뒤에도 소녀는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 “으음, 난감하네.” 신발 밑창이 바닥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소녀: “일단 근처에서 잠을 잘 만한 장소를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돈이 없어. 요 며칠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교통비도 그렇고, 식비도 평소보다 많이 나가는 바람에……” 나: “용돈은 내일이면 들어오긴 할 텐데, 지금은 열차 티켓 살 돈 정도밖에 안 남았거든.” 소녀: “그런가요.” 아슬아슬하게 돈 쓸 일을 조절한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예상 밖의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다. 소녀는 군말 없이 근처 의자에 앉아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가뜩이나 옅었던 역내의 밀도는 막차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나: “괜찮겠어?” 소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제게 불평할 권리는 없어요. 그리고 저는 이런 일이 익숙하니까, 오히려 괜찮겠냐고 물어봐야 하는 쪽은 저인걸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오히려 내가 더 머쓱해진다는 걸 소녀는 알고 있을까. 소녀의 옆자리에 앉기 앞서, 나는 근처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와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 “감사합니다.” 내가 건넨 캔음료를 받아든 소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캔을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소녀도 목이 말랐던 건지, 꼴깍꼴깍 음료수를 마셨다. 나는 소녀의 옆자리에 앉아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소녀: “그나저나, 요 며칠 동안 진전이 거의 없네요.” 음료수를 마시다 말고, 소녀는 역시나 신경 쓰인다는 듯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나: “괜찮아.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나도 들고 있던 캔음료를 따고선 마른 목을 축였다. 복잡미묘한 감각이 나의 몸을 타고 흘러갔다. 나는 반쯤 내용물이 남은 캔을 든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나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녀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유령은 생리활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소녀: “또 그 이야기인가요.” 나: “아냐, 이번엔 진짜 궁금한 게 있어서.” 소녀: “…… 뭔가요.” 나: “유령은, 눈물을 흘려?” 옆을 돌아보자, 나를 못 미더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소녀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녀: “지금까지 그런 고민 하고 있었던 거였나요.” 나: “뭐, 그렇지.” 소녀는 자세를 고쳐 잡고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소녀: “글쎄요. 저는 그런 적 없는 것 같아요.” 나: “하긴, 우리가 처음 이야기했을 때도 울지는 않았었던 것 같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는 건 기억나지만, 확실히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지는 않았었다. 악몽을 꾸었을 때도, 죽음을 보았을 때도, 공포에 질렸다뿐이지 소녀의 우는 모습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소녀: “이런 걸 눈물이 메말랐다고 하는 걸까요?” 나: “글쎄, 잘 모르겠네. 다음에 같이 슬픈 영화라도 보면 확인할 수 있지 않으려나.” 소녀는 대답을 건네는 대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미널의 조명이 최소한의 빛만을 남겨둔 채 하나하나 꺼져가고 있었다. 방금 막 터미널에 마지막으로 편성된 열차가 떠나간 모양이었다. 할 일도, 할 말도 없어진 나는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나: “윽.” 하루종일 GPS를 켜둔 탓에, 배터리는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태블릿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선 시간을 보내는데, 태블릿에서 약한 진동이 울렸다. 태블릿이 방전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어느새 시간에 섞여 희석되어가던 역내에는 나와 소녀,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 집에서 소녀와 함께 있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지만, 이런 공간에 소녀와 단둘이 있는 건 또 다른 묘한 느낌이었다. 나: “있잖아, 만약 네가 바람대로 사라질 수 있게 된다면, 그 전에 하고 싶은 일 같은 거 있어?”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이야기를 건 쪽은 나였다. 소녀: “글쎄요. 생각해본 적 없어요.” 나: “하긴, 그렇겠지.” 소녀: “하지만, 생각해볼 수는 있겠네요.” 소녀는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소녀는 자신이 바랐던 대로 끔찍한 것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사라질 수 있게 된 상황을 떠올린 건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선 몇 가지, 자신이 생각해낸 ‘하고 싶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내게 늘어놓았다. 이야기는 점점 가지를 뻗어나가, 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고르기로 한다. 소녀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한 문장으로 표현할 자신의 소원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다듬어갔다. 소녀: “이런 이야기 하니까 꼭 유언장을 쓰는 것 같네요.” 나: “그러게. 사후에 쓰는 유언장이라니 묘하긴 하지만.” 소녀: “저는 유언 같은 거 남겼을까요?” 나: “글쎄. 유언은 보통 자신이 죽을 걸 직감한 사람이 남기는 거잖아.” 소녀: “어쩌면 저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생이었는지도 모르죠.” 소녀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조금 더 마음에 드는 문장을 위해 나와 소녀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나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소녀는 자신의 소원이 담긴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소녀가 내린 결론은, “누군가와 함께 아름다운 것을 보며 사라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추상적인 결론이었음에도 소녀는 자신의 유언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 “그 누군가는 네가 기억하고 있는 '따스함'의 주인공인 거지?” 소녀: “아마도요.” 애써 묻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지만, 어느새 나는 그걸 질문이랍시고 하고 있었다. 소녀는 나의 질문에 반쯤 긍정을 표하고선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소녀가 웃었기에, 나도 따라 웃었다. 어색했다. 웃음으로선 오롯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맴돌고 있었다. 소녀: “이번엔 당신의 유언을 듣고 싶어요.” 나: “나한텐 너무 먼 이야기 아닐까?” 소녀: “멀쩡히 살아있는 자의 여유인 건가요.” 확실히 의도와는 달리 해석될 여지가 다분한 말이었다. 날카로운 소녀의 한 마디에 움찔해서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하긴, 소녀도 살아만 있었더라면 나와 같은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유언이라니, 살아있는 10대 소년에게 그런 걸 생각해보라고 하는 건 너무 난해한 일이다. 물론 죽어있는 10대 소녀에게 그런 걸 물어보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평범하게 생각해보자.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노부부의 마지막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나: “그냥, ‘마지막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다.’ 정도 아닐까?” 소녀: “낭만적이네요.” 소녀는 짤막한 감상을 이야기하고선 피곤한 듯 슬쩍 눈을 감았다. 아무리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튼튼한 척한다 해도 중학생 정도의 체력임은 분명했다. 아직 잠들고 싶지는 않았는지 소녀는 간헐적으로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점점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잡음이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터미널의 공기가 나의 감정을 미묘한 방향으로 자극했다. 나의 옆에서 아마도 눈을 감고 있을 소녀의 존재 또한, 나의 감정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자극하고 있었겠지. 나: “있잖아.” 나의 목소리를 들은 소녀가 스르륵 눈을 떴다. 나: “만약 네가 사라지게 된다면 말인데. 내가 그 온기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아름다운 것'을 나와 함께 볼 수 있을까?” 요령 없이 기워 붙인 말에, 소녀가 웃었다. 소녀: “뭔가요, 그런 이야기는.” 나: “그러게. 뭘까, 이런 이야기는.” 나도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짤막한 웃음이 지나가고, 끝을 알 수 없는 적막이 둘 사이를 메운다. 그런 적막이 어색했는지, 소녀는 텅 빈 지 오래인 캔을 입에 갖다 대고는 딴청을 피웠다. 나: “…… 다 마셨으면 빈 캔은 줘.” 빈 캔을 소녀에게서 받아든 나는, 반대편의 쓰레기통을 향해 캔 두 개를 연달아 던져 넣었다. 알루미늄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빈 캔 두 개가 쓰레기통 속으로 휘리릭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본 소녀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소녀: “야구를 잘한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네요.” 굉장한 묘기라도 본 것 같은 소녀의 표정에, 나는 머쓱함이 잔뜩 묻은 투로 반응하는 수밖엔 없었다. 나: “별거 아니잖아. 그렇게 안 쳐다봐도 돼.” 소녀: “이 정도면 거리도 꽤 되는 것 같은데요.” 무릎을 끌어안고선 반대편 쓰레기통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 소녀. 나는 소녀를 힐긋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나: “혹시 야구에 관심 있어?” 소녀: “…… 글쎄요.” 정면을 응시하며 얼굴을 반쯤 무릎에 파묻은 소녀는 아무래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더 이상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어깨에 요정이 눌러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자, 새근새근 잠이 든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가까웠다. 소녀의 얼굴에 비치는 어두운 터미널의 조명은 그녀 자신이 갖는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수는 없다지만, 소녀의 외모는 그녀를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없을 정도로 설명하는 듯했다. 치밀한 곡선, 차분한 이목구비, 그리고 차분한 머릿결.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외로 지금처럼 무방비함을 보이는 건, 소녀의 앳된 면으로부터 비롯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소녀를 이루는 그 모든 부분들이, 나를 잡아끄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지? 어째서일까? 어이없으리만치 바보 같은 감정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속도와 중력을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지금 동질감과 그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소녀는 나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임과 동시에 나의 곁에서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이다. 내가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건 바보같은 일이다. 이성은 내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감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바보같은 생각은 그만두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이런 감정도 머릿속에서 시간에 섞여 희석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소녀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데,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소녀: “…….” 나의 시선이 자리를 뜨지 못한 곳에서 소녀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언젠가 종종 보았던 악몽을 꾸는 듯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나: “……?!” 무언가 생각을 하기도,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소녀의 팔이 나를 덥석 붙잡았다. 소녀에게 붙들린 나의 오른팔은 옴싹달싹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요즘들어 악몽도 잘 꾸지 않았던 소녀인데, 잠자리가 바뀐 것이 원인인 걸까. 더듬더듬 생각을 해나가던 나는, 항상 소녀가 잠에 들 때면 곁에 있던 인형이 오늘은 사라져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 “하아아…….” 이래서야, 도저히 눈을 붙일 수 없을 것 같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선, 옆을 힐긋 돌아보았다. 소녀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소녀에게 붙들려 움직일 수 없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요함만이 가득하던 터미널 역사에는 익숙한 멜로디가 조용하게 울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붙들고 있던 소녀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정말 나의 어깨에 내려앉아 잠에 든 요정처럼, 소녀는 악몽에서 빠져나와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해가 밝아오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소녀의 자세를 고쳐 주고는 열차표를 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일어났어?” 역내로 돌아오자, 잠에서 깬 소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부스스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소녀. 소녀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역내에는 듬성듬성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자기선로에는 오늘의 첫 햇살을 머금은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공복을 느낄 틈새도 없이 씻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뻗어 잠들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새벽이었다. 꼬박 몇 시간을 죽은 듯이 잔 건지. 침대 위에서 눈을 뜬 나는 바닥의 이부자리에서 인형을 껴안고 자고 있던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잠들기 전에 저녁이 되면 깨워달라고 소녀에게 부탁을 하긴 했었는데, 소녀가 나를 깨우지 않았을 리는 없고, 아마 내가 죽은 듯이 잠을 자는 바람에 소녀가 나를 그대로 내버려둔 거라 생각했다. 뒤늦게 공복과 갈증을 느끼고는 냉장고를 살피던 나는 텅 빈 냉장고를 확인하고는 짤막하게 절망했다. 나: ‘일어나면 마트부터 가야겠네.’ 다시금 침대에 몸을 누이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침대의 푹신한 감촉을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나는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일어나기 전부터 깨어나 있던 소녀는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나를 유난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오늘도 어디 가려는 건가요?” 나: “냉장고가 비어 있어서. 마트 좀 갔다 오려고.” 소녀: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나: “따라와도 괜찮겠어?” 소녀: “괜찮아요.” 내가 뭐라 더 물어볼 틈도 없이, 소녀는 현관을 나서려는 나의 옆에 섰다. 나: “밖에 나가는 거 싫어하지 않아?” 소녀: “괜찮다니까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출발이나 해요.” 나: “…… 알겠어.” 굳이 나가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일단은 소녀와 함께 마트로 향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저께부터 불쾌지수가 높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여전히 더위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몇 걸음만 걸어도 땀범벅이 될 것 같은 불쾌한 날씨. 더위를 머금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의 옆을 걷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특별한 이유 없이 소녀가 밖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소녀는 여전히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인지 어색하게 시선을 처리했다. 왜 굳이 마트 가는 데 따라 오려 한 건지 물어보고 싶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자동문이 열리고, 마트로 들어서자 건조한 에어컨 바람이 나와 소녀를 맞이했다. 내 기준으로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트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다들 부지런하구나. 밋밋한 감상과 함께, 나는 카트를 끌고 식료품 코너로 향했다. 소녀는 나를 졸졸 따라오며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평소처럼 식료품 코너에 도착해 냉동식품을 카트에 담으려는 나를, 소녀의 목소리가 멈춰 세운다. 소녀: “저기…… 괜찮다면 제가 장을 봐도 될까요?” 나: “으응……? 나야 괜찮지만…….” 나는 담으려던 냉동 필라프를 도로 진열대에 올려놓고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확신이 묻어있는 것만 같은 소녀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그럼, 장 보는 건 저한테 맡겨 주세요.” 나: “어…… 알겠어.” 봐 둔 곳이 있다는 듯, 소녀는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소녀를 따라 카트를 움직여 도착한 곳은, 여러 번 마트를 들르면서도 발길이 닿지 않았던 장소였다. 항상 냉동식품이나 통조림같은 가공식품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로선 눈길조차 자주 주지 않았던 괴리감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소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식재료를 착착 담기 시작했다. 인공육이나 GMO 채소같은, 연구소의 배양 접시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식재료들이었다. 가공되지 않은 식료품을 판매하는 코너에는 간간이 몇몇 사람 정도만이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세상에서, 굳이 요리를 한다는 수고를 무릅쓰고 이런 식재료를 구매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 또한, 그런 편의주의적인 흐름에 물든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말이다. 나: “저기, 나 요리할 줄 모르는데.” 소녀: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소녀는 태연히 이야기하며, 진열대 위쪽에 위치한 토마토를 가리켰다. 소녀: “저기, 저 토마토 좀 카트에 담아 주세요.” 나: “아, 으응.” 하긴, 평소에도 집안일에 익숙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다른 건 기억하지 못하면서 요리 레시피는 기억할 수 있는 건가?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소녀가 요구한 대로 토마토 한 바구니를 카트에 담았다. 소녀가 이끄는 대로 카트를 끌며, 익숙하지 않은 궤도에 몸을 맡긴다. 카트에는 소녀가 꼼꼼히 엄선한 식재료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소녀: “둘 중에 어떤 게 좋을 것 같나요?” 나: “음…… 난 저게 더 괜찮아 보이는데.” 물건 하나를 고를 때마다, 소녀는 내게 꼭 양자택일의 질문을 건네 왔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내 눈에는 모두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었지만, 꼼꼼히 식재료를 엄선하려는 소녀의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그녀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을 하려 애썼다. 소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겐 분명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비쳐졌을 테지만,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주변은 한산했다. 가끔씩 나에게 시선이 닿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나: “이 정도면 대충 장은 다 본 건가?” 소녀: “으음, 그런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식비를 많이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 “그렇겠네.” 인기가 없으니 가격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이다. 소녀가 나를 따라 마트에 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걸까. 소녀는 아무래도 내가 그때 역에서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 “그럼 돌아갈까.” 익숙하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 찬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하려는 찰나였다. 나: “……?” 유미: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맞았네!” 유령처럼 어느새 나의 앞에 불쑥 나타난 유미가 나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반가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유미: “와아, 우리 생각보다 자주 만나는 것 같지 않아?” 나: “으응, 그러게.” 유미: “이거 운명인가? 이러다 다음번엔 다른 곳에서 마주치는 거 아냐?!” 나: “그렇다고 운명이랄 것까지는…….” 호들갑 섞인 반응과 함께, 유미는 마침 자신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며 나의 옆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소녀: “그때 횡단보도에서 같이 있던 여자인가요.” 옆에서 유미의 고조된 목소리와는 확연히 상반된 소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유미의 얼굴을 소녀는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나와 유미를 한 번 힐긋 바라보고선 조용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뭐랄까, 물과 기름을 한데 부어 놓은 듯한 분위기가 소녀와 유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유미: “못 본 사이에 뭐 하고 지냈어?” 나: “뭐…… 그럭저럭. 특별한 일은 없었어.” 유미: “그렇구나~” 애초에 유령에 관한 이야기는 유미에게 말하지 않기로 생각해두었기에, 나는 유미의 말에 적당한 반응을 보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뒤로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이렇다 할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나는 오랜만에 가벼운 감정들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유미: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나: “아니.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나와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던 유미가 문득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유미: “오늘따라 카트에 담긴 물건들 면면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야. 혹시 집에 가족이라도 오나 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나: “으응……? 별일 아냐. 이건 그냥…….” 유미: “그냥?” 즉흥적으로 뭐라 상황을 지어내려 했는데, 갑자기 전원이 꺼진 것처럼 사고가 멈췄다. 당황한 티를 최대한 감추려는 나를, 유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미: “흐음, 역시 무슨 다른 일이 있는 거지?” 나: “에이, 그런 거 아냐.” 유미: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아니고? 가족이 아니라 집에 다른 사람이 있다거나…….”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옆으로 힐긋 눈길을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유미를 구경하고 있던 소녀가 보였다. 내가 별다른 힌트를 준 적도, 무심결에 소녀의 존재를 드러낸 적도 없었는데. 유미는 어느새 진실에 꽤나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 같았다. 유미: “혹시 집에 다른 여자라도 있는 거야?!” 나: “아, 아니거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유미의 한 마디에, 나는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이게 여자의 직감이라는 건가. 나는 오른팔에 소름이 돋아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팔을 슬쩍 내리고선 카트를 계속 밀었다. 유미: “킥, 농담한 거야, 농담.” 유미는 나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 “…… 좀 짓궂은 장난이네.” 유미: “만약 그랬으면 지금도 같이 있었겠지?” 나: “어, 으음…… 아마 그렇겠지.” 계산대에 도착해 카트에 담겨있던 물건들을 계산하며 은근슬쩍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소녀와 나의 사이에는 한치의 불건전함도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소녀의 존재를 이야기했다간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 계산대에서 먼저 계산을 마친 유미는 출구 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산한 물건들을 챙겨들고 유미에게 걸어가던 나는, 바깥을 바라보다 말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 “어라, 밖에 비 오고 있었네.” 바깥에는 제법 세찬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유미: “우산 안 챙겨 왔어?” 나: “으응…… 비 올 줄은 몰랐는데.” 유미: “어제 일기예보에서 오늘부터 장마라고 이야기했잖아.” 어젠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으니, 그런 걸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어쩐지 며칠 동안 습기 찬 날씨가 계속 되더라니, 장마가 오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대략 난감한 상황인 건 분명했다. 혼자였다면 유미에게 혹시 우산 좀 같이 쓰고 갈 수 있냐고 염치없이 물어본다거나, 그냥 비를 잔뜩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역시나 신경 쓰이는 건 소녀의 존재였다. 나는 난감한 듯 유미를 한 번, 그리고 소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유미: “자, 이거 쓰고 가.” 유미는 들고 있던 손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난감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던 내게 그것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접이식 우산이었다. 나: “너는 어떡하고?” 유미: “나는 부모님이랑 같이 마트 들른 거거든. 지금 위층에 계셔. 우산은 같이 쓰고 가면 되니까 괜찮아.” 나: “아, 그렇구나. 그럼 고맙게 쓸게.” 나는 유미로부터 우산을 건네받고선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했다. 유미: “다음에 시간 날 때 돌려줘. 난 올라가 볼게.” 나: “으응. 다음에 봐.” 유미: “히, 그랬으면 좋겠네.” 나는 유미가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선,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뒤섞여 이루어진 한숨이었다. 소녀: “감이 좋은 여자네요.” 나: “그러게 말이야.” 유미가 사라지자, 그제야 나의 옆을 아무 말도 않고 따라오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유미가 건네준 우산을 펼쳐 들고는 소녀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나의 어깨에 소녀의 어깨가 맞닿는다. 나: “두 명이 쓰고 가기엔 조금 좁네.” 소녀: “그러게요.” 우산 끝자락을 타고 흘러내린 빗방울이 어깨로 떨어졌다. 비에 젖어가는 소녀의 팔이 신경 쓰여서인지, 나는 소녀 쪽으로 우산을 조금 더 기울였다. 소녀: “그나저나…… 우산을 그렇게 들고 있으면 바보 취급받지 않을까요?” 나: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확실히 그랬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우산을 이상하게 기울인 채 비를 다 맞고 있는 바보처럼 여겨지겠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바보같은 행동을 하는 나의 존재가 소녀가 옆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묘한 웃음을 내뱉았다. 나의 존재가 소녀의 존재를 증명한다……. 알 듯 모를 듯한 문장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빗속을 걸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누군가와 어깨를 맞댄 채 빗속을 걸어가는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그립게 느껴졌다. 빗소리가 무의식 속에 파묻혀 있던 기억 한편을 두드렸다. 나: “이렇게 누군가랑 같이 우산을 쓰고 걷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소녀: “그때도 이렇게 우산을 씌워 주는 쪽이었나요?” 나: “…… 아니. 반대야.” 소녀: “정말요? 의외인걸요.” 나: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렇지만, 분명 내 곁에 있었던 건 분명한 그런 기억이었다. 소녀와 맞닿지 않은 쪽의 어깨가 잔뜩 젖어버린 탓이었을까, 싸늘하다고만 느껴져야 했을 소녀와의 접촉은 나로 하여금 따스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따스함이, 분명 언제, 어디에선가 존재했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인지도, 어디에서인지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집에 도착해 어둑어둑해져 있던 방에 조명을 드리우자, 비에 잔뜩 젖은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 “먼저 씻어. 난 좀 있다 씻을게.” 그런 이야기와 함께 장바구니를 내려놓는데, 곧이어 소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소녀: “전 식사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먼저 씻으세요. 훨씬 많이 젖었잖아요.” 소녀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있던 내 차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녀는 이미 양보할 생각은 없는 듯 장바구니에서 식재료를 꺼내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자 어딘가 그리운 구석이 느껴지는 향기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식사 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해 보였다. 나는 식탁에 자리를 잡고선 분주히 손을 움직이는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나: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요리를 할 생각을 한 거야?”” 소녀: “갑자기 레시피가 떠올라서요. 그뿐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다며 소녀는 딱 잘라 말했지만, 나는 소녀가 그토록 의미가 결여된 행동을 선뜻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소녀의 짤막한 말과 단순한 행동에는 그에 맞는 의미가 확실히 결부되어 있었으니까. 설령 그 말과 행동의 의미가 무표정함 속에 숨겨져 있다더라도 말이다. 소녀는 새하얀 밥과 자신만의 레시피로 만들어진 반찬들을 식탁에 내어놓고는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접시에서는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소녀: “맛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잘 먹을게”라는 감사의 표현과 함께 젓가락을 들려는 나에게, 소녀는 영화나 소설 같은 데서 필히 등장할 것만 같은 대사를 건넸다. 소녀가 만든 음식을 맛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반응 또한 그런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의 대답은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소녀: “으음…… 어떤가요? 별로인가요?” 나: “아냐, 엄청 맛있어. 그러니까, 내 입맛에 딱 맞다고나 할까.” 소녀: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마음이 놓인 듯 소녀는 그제야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소녀의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 묻어있었다. 한 입 더 소녀의 요리를 음미했다. 소녀가 만든 음식은 정말로 맛있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정말, 마치 나를 위한 레시피로 만들어진 음식처럼 말이다. 나: “혹시 이 요리 레시피, 알려 줄 수 있어?” 소녀: “그건 갑자기 왜요?” 나: “맛있어서, 나중에 혼자서도 만들어 보고 싶네.” 소녀: “…… 다음에 시간 나면 알려 줄게요.” 소녀는 약간 머쓱한 듯 웃음 짓고선, 식사를 계속했다. 물론 나 혼자 만든 요리가 이런 맛을 낼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런 기분 정도는 다시 한번 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약간은 쌉쌀한 끝 맛이 맴도는 상상이었지만, 오히려 그 쌉쌀함이 지금 이 순간의 맛을 돋우는 것 같기도 했다. 항상 2인분 치의 양을 조절하는 데에 애를 먹었던 나와는 달리, 소녀가 내온 음식은 둘이 먹기에 안성맞춤인 양이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선, 소녀와 함께 뒷정리를 했다. 뒷정리가 끝나고서야 소녀는 젖은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에 몸을 털썩 누였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섞인 채,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날 밤에 들었던 물줄기 소리와 마찬가지로, 귓가에 울리는 물줄기의 울림이 너무나도 편안하게 느껴져서인지. 나는 이 순간이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거세진 빗줄기가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당한 크기로 들려왔다. 샤워를 하고 나온 소녀는 벽에 기대어 앉아 나른한 얼굴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녀의 품에는 테루테루인형이 꼭 안겨 있었다. 툭툭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에 맞추어 소녀의 눈동자가 깜빡였다. 어울린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건지. 소녀는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에 집중해 깊은 감상에 잠겨 있는 듯 싶었다. 소녀: “이렇게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나: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모양이네.” 소녀: “아마도요.” 태블릿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던 내게, 소녀가 갑자기 말을 건네왔다. 소녀: “저, 기억 나는 게 하나 있어요.” 나: “정말? 뭔데?” 소녀: “비가 오는 날이면, 누군가가 항상 제 곁에 있었어요.” 나: “레인 맨 같네.” 소녀: “레인 맨이요?” 나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선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 “아, 그런 게 있어. 뭐…… 기억 속의 수호천사 같은 거라고나 할까.” 정확히는 오래된 영화에서 나온 말이지만. 아마 이곳에서는 통용되지 않을 표현일 것이다. 소녀: “왠지 되게 포근하게 들리는 단어네요. 레인 맨…… 꼭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것만 같은 말이에요.” 나: “글쎄, 아마 아닐걸.” 소녀: “왜요?” 나: “잘 안 쓰이는 말이거든.” 소녀: “으음, 그런가요.” 소녀는 ‘레인 맨’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듯 보였다. 소녀: “하지만 꼭 저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처럼 들렸거든요.” 정확하게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가 아닐까, 라고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장마가 계속되는 며칠 동안, 나는 평범하게 전자 서재에 저장되어 있던 E북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있을 때면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소녀가 나의 곁으로 스르륵 다가와 “심심해요. 같이 봐도 될까요?”라며 나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소녀와 함께 책을 읽고, 영화를 감상한다. 소녀를 옆에 두고 독서를 할 때면 책의 내용보다 소녀가 페이지 어디쯤을 읽고 있었는지가 더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왠지 모르게 소녀와 함께 생각의 속도를 맞추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애초에 기나긴 비 소식이 아니라면 장마라는 이름이 붙을 턱이 없겠지만, 올해의 장마는 유난히 긴 것 같았다. 덕분에 소녀의 기억을 재조립하는 일도, 성불의 실마리를 찾는 것도, 비가 오는 동안은 모두 일시 정지된 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도 어느덧 나흘째였다. 눈을 뜨자마자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나: “오늘도 비네.”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쪼그려 앉아있던 소녀는 마치 잔잔한 음악을 감상하듯 빗소리에 기대어 있었다. 오늘은 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려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려는데, 침대에서 내려온 소녀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왔다. 소녀: “아침 준비할까요?” 나: “아, 으응. 고마워.” 소녀: “뭘요.” 소녀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나의 말에 간단한 반응만을 보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아침을 준비하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빗소리가 그치기 시작하면 다시금 천천히, 어쩌면 급속도로 바스라질 현실감 없는 현실. 깨어나 보면 꿈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는 지금의 상황에, 나는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에는 현지가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현지도 그날 이후로 큰 진전은 없는 듯해 보였다. 요 며칠간을 요약하자면 비현실과 현실 사이에 애매하게 끼여버린 단조로운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일상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 그날 밤, 빗소리가 멎었다. 빗소리가 멎어든 것을 먼저 눈치챈 건 내가 아닌 소녀였다.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노래가 갑자기 멈추기라도 한듯, 소녀는 사그라든 빗소리에 반응해 창가 쪽으로 다가섰다. 나: “어때, 비는 그쳤어?” 소녀: “완전히 그친 건 아니지만, 부슬비 정도예요.” 나: “그런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손바닥 위로는 몇 방울 정도의 빗줄기가 떨어졌다. 가느다란 물방울이었다. 나: “이 정도면 밖에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잠깐 바람이나 좀 쐬고 와야겠다.” 나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선 옷걸이에서 집어 든 서머 카디건을 몸에 걸쳤다. 소녀: “어디 가려고요?” 나: “그냥 잠시 기분 전환할 겸 나갔다 오려는 거야. 딱히 가려는 데는 없어.” 소녀: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여지껏 심심했거든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신을 신으려다 말고, 나는 그런 소녀를 잠깐 바라보았다. 평범한 일상의 색이 덧씌워진 소녀의 모습에서는 유령의 흔적 같은 건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의 얼굴에서 생기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착각인걸까? 소녀: “왜 그래요?” 나: “아, 아냐. 아무것도.” 잠깐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내게 소녀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이내 현관 수납장을 열어 장대 우산 하나를 챙겨 들며 화제를 돌렸다. 나: “우산은 어떻게 할까? 접이식 우산이 하나 있긴 한데.” 현관문을 열자, 부슬부슬 내리는 가느다란 빗방울이 나와 소녀를 맞이한다. 밤중의 새까만 하늘과 딱 어울리는 색의 장대 우산을 펼쳐 들고는, 크기를 가늠했다. 나: “이 정도면 두 명이 쓰고 가기에도 충분하지 않을까?” 소녀: “그렇네요. 괜찮을 것 같아요.” 소녀는 우산 아래로 들어와서는, 이번에도 나의 어깨 한쪽을 빌렸다. 확실히 두 명이 쓰기에도 넉넉한 크기의 우산이라, 이번엔 두 사람 모두 어깨가 젖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비가 그리 많이 내리는 것이 아니었기도 하고. 나: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좋네. 비가 와서 더위도 한풀 꺾인 것 같고.” 소녀: “그러게요.” 평소와 같은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소녀에게도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온 것이 내심 기분 전환이 된 모양이었다. 어쩌면 집 밖으로 나온 것보다는 아무런 부담 없이 우산 아래에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 소녀의 목소리를 가볍게 만든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소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한층 들뜬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그런 소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좋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파문이 가느다란 호를 그린다. 환한 백색등을 내뱉는 가로등 아래에 놓인 물웅덩이로 우산을 쓰고 걷는 나의 모습이 비쳐졌다. 물방울에게 비쳐지는 나는 홀로 우산을 쓴 채 거리를 걷고 있을 뿐이겠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에, 소녀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투명한 물웅덩이에도, 희미한 조명이 새어 나오는 가게 유리창에도 비쳐지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어째서 나의 눈동자에만 새겨지는 걸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소녀를 바라보던 중, 나의 옆에 붙어 가만히 길을 걷던 소녀가 내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소녀: “그나저나, 비가 와서 안 좋은 점이 하나 있었네요.” 나: “응? 뭔데?” 소녀: “손을 잡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잖아요.”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가벼운 리듬에 취하기라도 한 듯, 소녀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며 쿡쿡 웃어 보였다. 분명 말 그대로의 의미 이상도 갖고 있지 않았을 테고, 내가 그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나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색한 얼굴색을 띠고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나: “그, 그러게.” 소녀: “그런데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가요?” 나: “기분 전환 한다고 했잖아. 그럴 수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야.” 혼자 집을 나왔다면 그냥 집 주변만 걷다 오려 했었지만,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익숙한 골목을 걷고 있었다. 비가 내린 골목길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뒤섞인 빗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솜사탕에서 비가 쏟아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향기였다. 소녀: “달콤한 향기네요.” 나: “맞아. 기분 전환하는 데엔 달콤한 게 최고니까, 라고 누가 말하더라고.” 혹시나 비가 와서 문을 닫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했지만, 크레페를 파는 노점에는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평소였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을 크레페 가게 앞에 서서 곧장 딸기 크레페 두 개를 주문했다. 달콤한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소녀는 이를 반짝이는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우산을 든 반대쪽 손으로 크레페 두 개를 건네받은 나는 뒤돌아서 소녀에게 크레페 하나를 건넸다. 소녀: “감사합니다.” 크레페를 받아든 소녀는 감사를 표하고선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나: “어때, 맛있어?” 소녀: “네. 따라오길 잘했네요.” 나: “그래……?” 뿌듯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선을 이룬다. 순간과 순간이 얽히고설켜 이루어진 감정선이 미묘한 종착지를 향해 가고 있음을, 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틀어진 소녀의 감정선이 나에게 다가와 얽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소녀의 감정선이 이루는 종착지가 정반대 지점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가득 메우고, 아주 잠깐 머릿속이 감정 대신 감각으로 물든다.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득, 소녀가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소녀: “어, 비 다 그친 것 같아요.” 나: “그렇네. 우산 접어도 되겠다.” 묻어있던 빗방울을 털어내고는 우산을 접었다. 내리던 비는 어느새 완전히 그쳐 길거리에 보이는 물웅덩이와 흐릿한 빗내음만이 비가 내렸음을 알리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나의 옆을 따라 걸으며, 소녀는 크레페를 오물오물 먹었다. 나 역시 크레페를 우물거리며 골목길을 걸었다. 오래간만에 만끽하는 밤공기였다. 공원 앞을 걸어갈 때쯤에는 소녀와 나의 손에 들려있던 크레페는 어느새 사라지고 은은한 딸기향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나의 옆으로 공원에서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꽤나 밝아 보이는, 네댓 살 정도의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 남매의 모습 같았다. 네 발자국 정도를 걸어갔을까. 우산이 들려있는 맞은편 손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소녀: “…… 비도 그쳤으니까요.” 서로의 손길이 전해지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색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가로등이 내뱉는 백색광이 산만해진 공기층에 부딪혀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었다. 무지개라 하기엔 조금 부끄러울 정도의 크기였지만, 아름다움을 숨기기엔 너무 커다란 빛이었다. 소녀: “예뻐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먼저 감상을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군더더기 없는 감상이라,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나: “그러게.” 소녀: “무지개는 햇빛으로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나: “난 무지개는 선녀를 하늘나라로 데려갈 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어쭙잖은 과학 지식을 이야기하는 대신, 나는 모르는 척 새어 나오는 빛의 산란을 감상했다. 가로등마다 펼쳐진 자그마한 무지개를 따라 걸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나 많은 무지개를 연달아 볼 수 있었던 것도. 위를 향해 치켜든 소녀의 옆모습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장마가 그친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파란 바탕에 새하얀 양떼구름을 흘려보낸다. 잠시 잠잠했던 찌는 듯한 더위도 은근슬쩍 다시 얼굴을 들이밀고는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린다. 하지만 어느덧 소녀의 죽음을 찾아 헤매는 일은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네 시간 정도 열차를 타고 도착한 F구역 터미널에서 버스로 갈아타서는 한 시간을 더 달렸다. 버스에서 내린 뒤 인적 드문 도로를 따라 30분 정도를 걷자 목적지로 했던 다리가 보였다. 다리 아래로는 장마로 인해 불어난 뿌연 탁류가 강줄기를 따라 불안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소녀: “여기인가요. 시체가 발견된 곳이.” 나: “으응, 정확히는 이 다리 아래에서지만.” 다리 위를 걸으며, 소녀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나: “그리고 사실상 여기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야. 여기서도 뭔가 얻는 게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엔 없어.” 소녀: “아직 두 군데가 남아있지 않았나요?” 나: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났던 사고라서 말이야.” 소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요?” 나: “E구역에서 일어났던 사고라서 그래.” 나: “아아, 모를 수도 있겠다. E구역은 올해 초에 폐쇄됐어. 그쪽 발전소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는 바람에 구역 일대가 마비됐거든.” 나: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주민들을 모두 여기 F구역으로 대피시켰고, 지금은 들어가는 길이 모두 막혀 있는 걸로 알고 있어.” 소녀: “그런가요, 어쩔 수 없네요.” 소녀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미간을 살며시 찡그려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소녀가 죽음의 잔해를 찾아 다리를 살피는 동안, 나는 난간대에 팔을 얹고선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강물은 며칠 전 장마가 내렸을 때의 하늘과 꼭 닮은 색을 하고 있었다. 난간대에 조금 더 체중을 실어 몸을 기댔다. 고개를 슬쩍 돌려 바라본 곳에서는 소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죽음의 색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소녀와 함께 죽음의 색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거니 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려는데. 주머니에서 휴대용 태블릿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들자 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웬일로 전화했어?” 현지: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선배 지금 어디예요?” 나: “조금 멀리 나와 있어. 갑자기 어떤 이야기?” 현지: “아…… 그게, 텔레이도스코프 관련해서 말인데요. 학교 옥상 안테나로는 텔레이도스코프의 출력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현지: “아마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다른 장소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한 번에 좀 더 많은 양의 전자기파를 송수신할 수 있는 장소로요.” 나: “그거 조금 난감한 상황 아니야? 다른 장소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현지: “그래서 선배한테도 이렇게 부탁하는 거예요.” 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내게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난감한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물론 나한테 부탁한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다만……. 나: “으음…… 알겠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찾아는 볼게.” 현지: “히, 고마워요 선배.” 나: “아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 나니까.” 왠지 고맙다는 말을 건네야 할 타이밍을 빼앗긴 것 같아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현지: “그럼― 아, 맞다. 그리고 선배가 말했던 그 유령 있잖아요.”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현지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현지: “어쩌면 텔레이도스코프로 그 유령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 “그게 정말이야?” 현지: “출력 문제가 해결된다면요.” 나: “알겠어. 더 알아낸 거 있으면 문자 줘.” 현지: “네에~” 휴대용 태블릿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선 난간대에서 팔을 떼어냈다. 몸을 완전히 난간대에서 떼어내고선 뒤를 돌아보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소녀는 내가 현지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 “어떻게 됐어? 기억나는 건…….” 소녀: “아닌 것 같아요.” 나: “그래? 여기도 아닌가…….” 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에 빨간 줄이 그이려는 순간이었다. 소녀의 기억을 되찾아 성불의 실마리를 알아낸다는 플랜 A가 어그러졌으니, 그렇다면 당분간은 현지에게 기대는 쪽으로 플랜 B를 잡아야 하려나.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현지에게 기대는 쪽이 플랜 A였는지도 모르고……. 소녀: “아뇨, 그게 아니라…… 보이지 않았거든요. 죽음의 색 말이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소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정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런가. 여기도 아닌 것이 아니라, 소녀는 여기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였다. 여기서부터 상황은 예상 밖의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 “…… 잘못 본 거 아냐? 실수로 놓쳤다거나.” 소녀: “그럴 리는 없어요.” 나: “음…… 하긴, 여태껏 그런 적은 없었지.” 소녀: “그래서 말인데요, 정말 여기가 맞는 건가요?” 나: “확실해. 실종 신고된 여학생의 시체가 이곳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났었으니까.” 소녀: “혹시 모르니까,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요?” 나: “요컨대, 너는 그 여학생이 죽은 곳이 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소녀: “…… 확실하진 않아요.” 나: “뭐, 알겠어. 그렇게 하자.” 말끝을 흐리는 소녀였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그 여학생의 시신이 상류에서 하구까지 떠내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강의 상류 쪽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갔다. 소녀는 길을 걸어 올라가며 열심히 강변을 살폈다. 물살의 폭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맞닿은 하늘과 어울리는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소녀: “그 여학생의 사인은 뭐였나요?” 나: “사고사라고만 되어 있어. 직접적인 원인은 아마도 익사겠지.” 소녀: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나: “혹시 자살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경찰 쪽에선 사고사로 결론 내린 모양이야.” 소녀: “음…… 그렇군요.” 강의 중상류쯤에 도착해, 나와 소녀는 가볍게 숨을 돌렸다. 나: “어때? 보이는 게 있어?” 소녀: “아뇨, 아무것도요.”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려다 말고, 나는 마침 근처에 있던 벤치를 가리켰다. 나: “저기, 벤치에서 잠깐 쉬었다 갈래?” 소녀: “좋아요.” 벤치 옆에 놓여있는 자판기에서 캔음료를 뽑아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 “감사합니다.” 내게서 음료를 받아든 소녀는 벤치에 앉아 강과 하늘이 이루는 장면을 감상하며 캔을 비웠다. 적당히 숨을 고를 동안, 나는 소녀의 옆에 앉아 태블릿을 켜 뉴스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무선 네트워크가 원활하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뉴스 기사를 검색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나: “그 여학생의 사망 추정 일자는 8월 16일, 그리고 시신이 발견된 일자는 8월 22일이야. 발견되었을 때 시신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물에 불어 있어서 제대로 된 부검은 진행하지 못했대.” 나: “그리고 이 여학생이 실종되었던 16일과 20일 사이에 긴 비가 내렸던 것 같아. 비가 엄청 많이 와서, 아마 이쪽 부근 길을 걷다 실족사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나 봐.” 소녀: “이상해요. 그렇다면 지금쯤 죽음의 색을 발견해야 했을 거라고요.” 소녀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소녀: “있잖아요, 이건 제 추측일 뿐이지만…….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 “어떤 건데?” 소녀: “먼저 첫 번째 가능성은, 그 여학생이 죽은 장소가 이곳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나: “여기가 아니라면……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거야?” 소녀: “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나: “하지만 그 여학생의 시체는 분명 강 하구에서 발견되었잖아.” 소녀: “그렇죠.” 마치 내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소녀가 이야기를 멈추었다. 나는 태블릿을 내려놓고선 소녀가 풀어 놓았던 이야기들을 조립해 나갔다. 나: “즉, 누군가가 그 여학생의 시체를 몰래 강에 버렸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거네.” 소녀: “추측일 뿐이에요.” 소녀는 그렇게 자신의 의견을 일축하고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소녀: “두 번째 가능성은, 여기서 발견된 시신이 바로 저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나: “…… 어떤 이유에서?” 소녀: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에요. 하지만 만약 그 여학생이 정말 이 부근에서 실족사한 것이 맞다면, 죽음의 색이 보이지 않을 이유는 달리 없으니까요. 어쩌면 저는 제 자신이 만들어낸 죽음의 색은 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죠.” 나: “아아, 그래서 아까 사고 현장이 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확실하지 않다고 얼버무렸던 거구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그럼 마지막 가능성은 뭐야?” 소녀: “위의 두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만족하는 거예요.” 나: “…… 동시에?” 소녀: “네. 동시에.” 그렇다는 건, 소녀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뒤 강에 버려졌다는 걸까. 머릿속에서 일련의 가설들이 하나하나 조립되기 시작했다. 소녀의 시신은 뒤늦게 경찰에게 발견되어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진범을 찾지 못한 채 사고사로 결론나게 된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 것이 억울함으로 남아있던 소녀는 그 원한으로 이곳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버렸다. 그런 이야기일까?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떨어졌다. 마치, 여태껏 있었던 일들이 모두 지금을 위해 일어난 것처럼. 나: “그렇다고 한다면, 네가 유령이 된 이유도 어쩌면 설명이 될지 몰라.” 소녀: “그저 가능성일 뿐이에요. 아주 희박한 가능성.” 오래간만의 진전에, 내 목소리가 약간은 감정적인 어조를 띠었다. 그에 반해 소녀는 여전히 차분함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추측에 신중함을 기하고 있었다. 나는 환상 속을 걷듯 추측을 계속 이어 나갔다. 소녀가 유령이 된 이유가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억울한 죽음이라 한다면, 나는 소녀의 억울함을 풀어줘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고, 난데없이 1년 전 여름에 있었던 사고가 실은 살인 사건이라는 이야기를 해봤자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나: “만약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진범을 찾는 일?” 소녀: “그런 위험한 일은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아요.” 소녀는 꽤나 단호한 어조로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소녀: “…… 그치만, 억울하겠죠?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사람은 죗값조차 치르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다면.” 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그렇겠지.”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질문이 그토록 중요한 질문이었을 줄은. 벤치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소녀가 몸을 휘청였다. 넘어질 뻔한 소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소녀는 금세 균형을 되찾았다. 나: “…… 왜 그래?” 소녀: “그냥 살짝 현기증이 난 것뿐이에요.” 나: “괜찮은 거야?” 소녀: “조금만 더 걸어요. 괜찮을까요?”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자, 소녀가 나의 손을 잡았다. 강변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점점 거칠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소녀는 아무래도 죽음의 흔적 같은 건 이곳에서 찾을 수 없었는지 이따금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심호흡을 내쉬었다. 소녀의 체온과 숨결이 나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40분 정도를 걸어 결국 수원지까지 도착해버린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수원지는 말 그대로 칙칙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풀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 돌 더미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는 이끼들이 푸르죽죽한 색을 발했다. 앉아있을 만한 평평한 바위를 찾은 우리는 그곳에 앉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시간을 때우는 것이기도 했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잠깐이나마 잊는 것이기도 했다. 나: “현기증은 이제 좀 괜찮아?” 소녀: “바람을 쐬니까 괜찮아졌어요.” 나: “다행이네.” 아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소녀가 말했다. 나를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해 있던 구름 한 조각이 서쪽으로 옮겨갔을 때쯤, 소녀의 시선이 어디엔가 고정되었다. 소녀를 따라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마리의 길고양이가 두어 발짝 건너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저기 봐요, 고양이예요.” 나: “정말이네.” 별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색으로 뒤덮인 고양이었다. 미래로 넘어온 뒤로 길고양이를 보는 것은 아마 지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유령이 되어 버린 소녀도 그건 매한가지였는지, 반짝이는 시선이 고양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 소녀와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나: “그런데 고양이는 널 볼 수 있어?” 소녀: “글쎄요. 잠깐만요.” 앉아있던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소녀는 조심조심 고양이를 향해 다가갔다.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건지,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이곳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느새 고양이 곁으로 다가간 소녀는 고양이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고양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발로 자신의 뺨을 매만지기만 할 뿐. 소녀: “고양이도 제가 안 보이는 것 같아요.” 고양이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소녀는 손을 뻗더니 고양이를 껴안아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고양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녀: “고양이는 이런 촉감이었군요.” 나: “처음 만져보는 거야?” 소녀: “말했잖아요. 살아 있었을 땐 고양이들이 저만 보면 도망갔었다고요.”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 가라앉아 있던 소녀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깃돌았다. 소녀는 여태껏 고양이를 만져보지 못했던 한을 풀듯 마음껏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머지않아 성불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소녀: “푹신푹신할 줄 알았는데, 약간 까슬까슬하네요.” 뿌듯함을 잔뜩 담아, 소녀는 고양이를 만져본 소감을 말했다. 소녀: “유령이 되어서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나: “애써 유령이 되었을 때의 좋은 점을 찾은 것 같네.” 소녀: “그런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나: “어라,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 나는 고양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소녀의 모습을 빤히 지켜 보았다. 그 장면을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이 기억밖에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위에서 일어나 고양이와 놀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려 하자, 고양이가 갑자기 반응을 보였다. 소녀: “우왓.” 울음소리를 한 번 내뱉고는 품에서 떨어져 나간 고양이는 갑자기 어디론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시선으로 고양이를 뒤쫓던 소녀가 급히 내게 말을 꺼냈다. 소녀: “따라가 봐도 될까요?” 나: “으응,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왠지 고양이한테 거부당한 것 같아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좁다란 길목으로 들어간 고양이를 소녀는 뒤쫓았다. 나는 천천히 그런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멈춰 선 소녀의 뒷모습을 발견하기 전까지도, 나는 이 길목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